[경향신문] “이제 스스로 지역을 선택하는 시대” ‘로컬파이오니어’가 제안하는 지역소멸의 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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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반플레이 홍주석 대표, 재주상회 고선영 대표, 개항로프로젝트 이창길 대표 & 청년 창작자 오병훈, 김성용 씨가 이야기하는 ‘로컬 중심 시대’
인구소멸, 지역소멸은 위기 단계를 넘어 현실이 됐다. 낭만적인 대안을 찾을 때는 지났다. 수많은 데이터가 청년 거주지 이동의 핵심은 ‘일자리’임을 증명했다. 청년세대에겐 그 이상이 필요하다. 낯선 지역이 ‘나의 동네’가 되는 데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로컬콘텐츠기업 어반플레이가 CJ올리브네트웍스와 함께 로컬 비즈니스의 기초와 실무를 배우고 디지털 역량까지 강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 ‘로컬파이오니어스쿨’을 열었다. ‘로컬파이오니어스쿨’은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추진하는 ‘청년친화형 ESG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청년들이 로컬 아이디어를 창업이나 취업 등 비즈니스로 실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평균 경쟁률 3대 1을 뚫고 선발된 청년 창작자 200명은 ‘골목길 경제학자’ 모종린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준규 양양 서퍼비치 대표, 안정기 <크리에이터 이코노미> 저자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의 특강과 멘토들의 가이드를 통해 지역 기반 라이프스타일 분야 ‘로컬 파이오니어’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로컬파이오니어스쿨 1기생 배출을 앞둔 지난 9월4일 서울 서대문구의 복합문화공간 연남장에 로컬파이오니어스쿨을 기획·운영하는 어반플레이 홍주석 대표와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고선영 대표, 개항로프로젝트의 이창길 대표, 그리고 이번 프로그램에 참가한 청년 창작자 오병훈, 김성용씨가 모였다. 지역 기반 크리에이터와 공간을 이어주는 어반플레이를 통해 연희동을 ‘가보고 싶은’ 동네 브랜드로 만든 홍 대표는 바로 창업을 해도 좋을 정도로 웬만한 창업스쿨보다 질 좋은 결과물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고선영 = 지금 로컬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대안이 아니라 로컬 중심으로 비즈니스가 옮겨가고 있다. 로컬에서 기회와 가능성을 발굴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교육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공유하던 차에 어반플레이를 중심으로 로컬파이오니어스쿨이 만들어졌다.
홍주석 = 이전에 로컬 관련 교육은 많았지만, 지역 문제를 기반으로 한 활동가 중심의 커뮤니티 형태가 많았다. 로컬파이오니어스쿨은 고용노동부에서 주관하는 기획이고, 청년들의 지속 가능한 취업·창업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로컬 교육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한다. 결국은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을 갖고 지역에서 창업하는 이들이 나와야 일자리 창출도 되고 그 지역의 생태계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고선영 = 기존 교육과 차별점이라면 디지털 분야가 결합됐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로컬 비즈니스가 지역의 물리적인 자원을 바탕으로 하는데, 당근(마켓)이나 프립처럼 지역 자원을 IT로 풀어낸 기업이 잘하고 있지 않나. 일차원적인 자원을 지금 세대와 어울리는 IT나 디지털과 결합한 비즈니스로 훌쩍 성장할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고 한다. CJ올리브네트웍스가 보유하고 있는 메타버스 서비스 ‘브릿지오피스’, AI 기반 ‘버추얼 휴먼’ 기술 등 디지털 역량을 지원하며 청년 창작자들의 성장을 도왔다.
이창길 = 지금 세대는 글로벌 스탠더드 교육을 기반으로 가치 소비와 환경 교육도 받았다. 굳이 ‘서울’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옛날에는 서울에 못 가기 때문에 로컬로 갔다면, 이제는 로컬이 좋아서 로컬로 간다.
고선영 = 그동안 로컬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는데 지역 대학에서도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로컬 콘텐츠 관련 비즈니스나 로컬 크리에이터 육성 교육이 생기고 있다.
홍주석 = 중소벤처기업부에서도 ‘로컬 콘텐츠 중점대학’을 육성하고 있다. 로컬파이오니어는 각 분야 전문가가 모여 5개월 이상의 교육 커리큘럼을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로컬파이오니어는 요즘 시대에 맞게 이론 수업은 메타버스 공간에서 진행하고, 멘토와 만나는 시간은 현장 대면 수업으로 진행했다. 이번 프로젝트의 아카이빙 작업에 참여한 고선영 대표는 국내 대표 로컬잡지 ‘iiin’을 10년째 발행하며 제주 콘텐츠의 가치를 알리는 데 일조했다. 구도심의 버려진 공간을 되살려 새로운 상권을 형성하며 인천의 새로운 매력을 알리는 데 앞장선 개항로프로젝트 이창길 대표는 생생한 현장의 노하우를 전달하는 멘토로 큰 힘을 보탰다.
이창길 = 지금은 워낙 정보가 많다 보니 다른 사람의 생각과 글을 계속 보다 보면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사업계획서에도 드러난다. 멘티들에게 “자신이 진짜 생각하고 느끼는 것만 담아도 충분하다”고 강조한다. 그럼 사업계획서가 바뀐다. 진심을 담아야 강력해진다.
홍주석 = 로컬에 먼저 진출한 선배라 해줄 수 있는 조언이다. 생활밀착형 창업이 국가 주도의 기술 창업과 달라야 하는 이유다.
고선영 = 재주상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제주 지역 콘텐츠를 찾아서 오프라인화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로컬의 발견자 같은 역할이다. ‘iiin’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창업하는 분들도 있다. 지역 창업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에 각자 일에 바쁜 가운데 로컬파이오니어스쿨에 많은 이들이 힘을 모았다. 일종의 책임감이나 소명 의식이기도 하다.
홍주석 = 부동산의 가치 변동 등 로컬에서 활동하다 보면 여러 가지 변수가 있다. 결국은 그 커뮤니티에 대한 안정감을 느껴야 버틸 수 있다. 중심 역할을 해주는 회사가 중요하다. 어반플레이도 연희동과 어울리는 브랜드와 만나 커뮤니티를 확장시켜나가는 일들을 계속하고 있다. 양양 서퍼비치와 인천 개항로프로젝트도 대표적이다.
고선영 = 앵커 기업이나 앵커 브랜드라고 부르는데, 첫 깃발을 꽂은 이런 기업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
이창길 = 대한민국이 족장의 시대가 되고 있지 않나 싶다(웃음). 온라인이 취향에 맞는 사람을 찾긴 좋지만 결국은 취향이나 기호, 라이프스타일이 맞는 이들과 공유할 오프라인 공간이 필요하다. 마음에 드는 부족이 있으면 합류하고, 만약 없으면 아무 데나 깃발을 꽂고 자기가 족장임을 선언하라고 말한다. 이제 스스로 지역을 선택하는 시대다.
홍주석 = 자기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가 로컬 비즈니스에서는 중요하다. 프런티어 정신이 있는 이들은 이미 ‘뜬’ 동네보다는 자신의 사업적인 아이디어나 성향에 맞는 동네를 찾는다. 로컬파이오니어 참가자들도 의정부, 파주, 동두천, 남원 등 의외의 지역을 선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회의 시장이라고 보는 것 같다.
고선영 = 지역에서 창업할 때 자신이 정착하고 싶은 지역을 존중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동시에 기존 비즈니스와 지나치게 겹치는 것은 금물이다. 현재 주민들이 불편해하는 점, 필요로 하는 점을 비즈니스화하는 것도 좋다.
홍주석 = 이창길 대표는 시니어 세대와 협업하는 일에 독보적이다. 목간판을 만드는 어르신의 서체를 로컬맥주인 ‘개항로 맥주’에 넣어 판매하고, 페인트 가게를 운영하는 어르신을 포스터 모델로도 기용해 화제를 모았다.
이창길 = 살면서 그렇게 많은 예상이 빗나가는 경험을 한 건, 어른들과 협업할 때였다. 그 과정에서 배운 건 어른들의 언어를 잘 써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와 같이해야 지역이 좋아진다고 막연하게 말한다거나, 무조건 바꿔야 한다고 강요하기보다는 그분들이 원하는 것을 해결하면서 동참시켜야 한다. 모델이 된 어르신은 MBC 뉴스에도 출연하고 셀럽이 다 되셨다. 어르신 서체는 유명 회사에서 개발 제안도 받았다. 어르신들이 우리 팀 자랑도 해줄 정도로 진심을 알아주신 것 같아서 뿌듯하다. 지역의 기적 같다.
기성세대의 지방행은 생업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이주 혹은 연고지로의 복귀 성격이 강했다. 요즘 세대는 로컬을 가능성으로 읽는다. 지역 활성화에 관심이 많은 참가자 오병훈씨는 2016년 세월호공동체회복 활동을 위해 고향을 떠났다. 안산의 이미지 개선에 일조하고 싶다는 그는 지역 커뮤니티와 비즈니스 결합에 대한 아이디어를 확장하기 위해 로컬파이오니어스쿨을 찾았다. 마을 공동체 및 공원이 많은 안산 지역의 자원을 활용해 식물을 매개로 로컬 콘텐츠를 향유하는 비즈니스를 꾸리려고 한다.
또 다른 참가자 김성용씨는 인천에서 살다가 서울로 진학했고 현재는 춘천에서 수의학을 전공하고 있다. 그는 로컬파이오니어스쿨을 통해 춘천의 인프라 부족에 대한 불평을 “내가 뭔가를 시도해서 바꿀 수 있는 전환점”으로 볼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동해형씨 김은율 대표로부터 멘토링을 받은 그는 강원도에서 나는 못난이 농산물을 이용한 강아지 수제 간식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6개월 내 완제품을 내는 게 목표다.
안산이라는 지역의 가능성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막연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로컬파이오니어스쿨을 통해 한단계 나아가 시도해볼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홍주석 = 지금이야 고성이 아주 ‘핫’하지만, 동해형씨가 시작할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고성에서 나는 자연산 수산물을 이용해 프리미엄 반려동물 간식을 만들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서울에서 창업할 수 없는 아이템이다. 지금은 주요 백화점에서 팝업스토어를 열 정도로 성공을 거뒀다. 이제 김성용씨 같은 예비 수의사가 로컬 자원을 활용하니 더 재밌는 상품이 나올 것 같다. 지역에서 창업한다고 하면 수제맥주 제조나 카페 정도만 떠올렸는데, 라이프스타일 분야를 중심으로 생각지도 못한 아이템이 나오면서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고선영 = 이번에 천연 서핑 왁스를 만드는 팀이 나왔다. 강원도 꿀농장과 협업해 해양오염 위험이 없는 천연 밀랍으로 보드용 왁스를 만든다고 한다. 대한민국 서핑 인구가 100만명이라지만 너무 시장이 작은 게 아닐까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 글로벌로 확장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과거에는 로컬-내셔널-글로벌로 갔지만, 지금은 얼마든지 로컬에서 바로 글로벌로 나갈 수 있는 시대다.
홍주석 = 중기부도 소상공인을 단순히 자영업자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의 로컬 브랜드로 바로 해외수출을 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는 정책을 갖고 있다. 로컬파이오니어스쿨에 참여한 청년은 물론이고 창업을 계획 중인 청년이라면 국내 시장에 한정하지 않고 글로벌 시장까지 염두에 두고 다양한 고민을 해보면 좋을 듯하다.
저희 학과(수의학과) 특성상 어느 정도 직업이 정해져있다보니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요. 우물안 개구리였던 거죠. 로컬파이오니어스쿨을 통해 내가 뭘 할 수 있는 지 보다 구체적으로 그려나갈 수 있었습니다.
오는 22일부터 10월3일까지 서울 연남장과 파크먼트 연희 등 연희동 일대에서는 로컬파이오니어스쿨을 마무리하는 ‘로컬파이오니어위크 2023’ 행사가 열린다. 대한민국 로컬 브랜드 발전사를 비롯해 로컬파이오니어스쿨 교육과정, 우수 참여자들의 창업 아이디어 등 전시와 함께 로컬 브랜드 대표들의 토크 콘서트, 취·창업 상담, 투어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이 진행된다.